4-3. 추악한 진실
경희의 얘기를 대충 짐작해 보면 혜린은 전날 엄마에게 친구들과 송년 파티를 하며 놀다 자고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형진과 같이 지낸 사실을 숨기려고 경희에게 전화를 해서 알리바이를 맞추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입장이 난처한 친구를 위해 한번 그렇게 해 줄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는 없고, 또 집안끼리 약속한 정혼자가 있는 애를 오빠는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이 만나고 같이 밤을 보낸다는 건 사실 제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돼요."
".....!"
"오빠에게 누를 끼칠까, 이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저도 답답하긴 마찬가지고 정말로 혜린을 아끼고 좋아한다면 오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어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하던지해서 혜린이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 주셨으면 해요."
나이 답지 않게 확실한 결단을 요구하는 경희의 어른스런 태도에 새삼스럽게 놀라며 형진이 변명이라도 하듯 연이어 말문을 열었다.
"믿어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둘이 함께 있던지 밤을 세웠다든지 그것 보다는 서로에게 진실하고 책임감 있는 행동이 중요 하다고 생각해."
"뜨거운 가슴을 지닌 젊은 청춘들이 만나서 약간의 스킨십은 있겠지만 혜린이나 너나 아직 나이도 어리고 나 역시 신학을 탐구하는 학생이자 신앙인의 입장에서 도덕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거니와 가야 할 길이 있고 사명이 있어서 함부로 처신 할 수도 없어."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 같은 사람에게 어찌 보면 혜린이는 과분한 여자고, 또 혜린의 집안을 봐도 너무 비교가 되어 망설여 지는 것 또한 사실이야."
" 다만, 금희랑 너희들이 동창으로 맺어진 친구라 내 동생처럼 아껴주고 뭐라도 어려우면 오빠처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이야."
조용히 듣고 있던 경희가 흥분이라도 했는지 나무라듯 한꺼번에 말을 쏟아 놓았다.
"오빠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정혼 문제 때문에 걔는 지금 당장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딱한 지경에 부딪혀서 앓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집안의 주선으로 정혼자랑 몇번 만났고,수개월내로 약혼식이라도 하고 졸업하면 곧바로 결혼을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걸로 알고 있어요."
"혜린이 생각은 어떻는데?
"차암, 오빠도 바보같이...걔가 하는 행동을 보고도 몰라요?"
".....!"
방학 기간동안 몇번의 만남에서 혜린의 태도가 미심쩍긴 했지만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지 꿈에도 몰랐던 형진은 해결 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힌 것처럼 답답하고 무능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사실 저도 오빠에게 불만 많아요."
잔뜩 삐친 모습으로 빤히 쳐다보며 경희가 말했다.
"어이쿠, 또 뭐냐?"
"옛날 같으면 시집가서 애를 낳아도 몇은 낳았을 나이인데...21살이 작은 나이길래 오빠는 말끝마다 어리다고 그러세요?"
발끈한 경희가 톡 쏘아 붙힌다.
"아가씨, 미안 미안...앞으로 조심 하도록 노력할게요."
"호호호.....!"
실소를 띄며 긴장을 풀고 형진도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저희 친구들도 다들 두사람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켜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오빠가 연장자고 남자니까 리더를 잘 하셔서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났으면 해요."
정리라도 할 듯 경희가 마무리를 짓는다.
"고맙다... 너희들이 나 보다 더 어른스러워."
"호호호...그 봐요. 여자가 남자들 보다 정신 년령이 높다니까?"
"하여간 좀 띄워주면 또 저래?
"호호호...암튼 커피 잘 마셨고, 오빠랑 같이 대화 하다 보면 마음은 편해요...이래서 혜린이가 끌렸나 봐요."
잠시전의 긴장감 도는 대화는 어디로 가고 웃음꽃을 피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일색이다.
"다시는 곤란하게 안할 테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무슨 부탁이에요?"
잠시 뜸을 들이던 형진이 말문을 열었다.
"외출 금지라니까 하는 말인데, 혹 연락이 되거든 혜린이랑 나랑 단 둘이 만날 수 있도록 네가 중간 에서 한번 만 더 역활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 그렇잖아도 오빠 만나고 내일쯤 혜린이 집에 들릴 거에요. 자주 놀러 가기에 뭐, 별다른 건 없는데 자꾸만 이런 일이 생기다보니 저도 혜린 엄마 뵙기가 조심스러워요."
"그래, 번번히 신세를 져서 미안하구나, 늦었는데 그만 일어 나자?
"예, 나가요."
경희를 만나고 혜린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간의 궁금증을 다 알아버린 형진은 흔들리며 달리는 버스 차창에 기대어 앉아 천년 바위처럼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하셨는데, 제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깊어 가는 어둠을 뚫고 질주하는 버스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는 형진의 마음은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럽도록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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