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추악한 진실
멀리 비진도 앞바다 통영만 위로 새해 첫날 해가 둥실 떠 올라 어촌 동네의 작은 포구에는 크고 작은 어선들이 한데 옹기종기 선창(船倉)에 묶여서 바람에 오색 깃발을 펄럭이며 떠 있었고, 오랫만에 고향을 찾은 몇몇 사람들은 곱게 차려 입은 한복을 여미며 인사 나들이를 하러 다녔다.
신정(新正)이라 오랫만에 일가족이 모여 먹거리를 잔뜩 차려놓고 간단한 가족 예배를 드린 후 둘러앉아, 그간 떨어져 지냈던 정담(睛譚)을 나누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조카의 재롱을 보며 잠시 웃음꽃이 머무르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저 방학 과제물 때문에 먼저 일어납니다. 편히들 앉아 노세요."
어릴적 돌림병으로 셋째 형이 일찍 돌아가신 탓에 다섯살이나 터울 차이가 나는 둘째 형 영진이 몸짓을 하며 일어나 안방 문을 나서는 형진의 뒤에서 말했다.
" 응, 그래라. 우리도 곧 가야지."
사업 차 약주를 즐겨 드시던 아버지께서 간암으로 신음하다 당신께서 일구어 놓은 재물을 다 까먹고 일찍 돌아 가신 탓에 학업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고 가업을 이어 받아 제법 상업 수완을 발휘하며 수협 중계인으로 해조류와 수산물 유통 사업을 꾸려 나가던 둘째 형이다.
건너편 사랑채 제 방으로 돌아 온 형진은 안방에 모여 이제 갖 돌을 지난 조카 딸 신혜와 여동생들의 재잘거리며 장난치는 웃음 소리가 간간히 새어 나오는 기분 좋은 소음을 들으며, 조직신학 교과서와 관련 서적을 펼쳐 놓고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방학 과제물인 리포트 작업에 열중 했다.
몇 시간째 리포트 작성에 매달리던 형진은 피곤했던지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켜다가 잠시 머리라도 식히려는지 방 안쪽 벽면에 있던 탁자 위의 텔레비젼을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멈추었다.
수년째 민주화 시위로 몸살을 앓던 긴박하고 어지러운 시국과는 달리 미사 어구로 치장된 화려한 연설문을 변명이라도 하듯이 낭독하는 대통령의 신년사가 화면가득 도배를 하고 있었다.
정의구현 사회 실현이니 일년여 남은 88올림픽이며, 순탄한 정권 교체와 탄력 받은 경제 호황을 치적인냥 자랑스럽게 늘어 놓으며 군 출신 다운 꼿꼿하고 당찬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연설에 임하고 있었다.
차마 듣기가 거북 했던지 신경질적으로 텔레비젼을 끄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손가락 깍지를 하고 긴 기지개를 하며 몸을 풀었다.
" 오빠 전화 받어?"
오빠들의 학업 때문에 여상을 졸업하고 부산의 수산물 가공 회사에 입사한 바로 아래 여동생 연희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 응, 누군데.....?
" 몰라, 예쁜 아가씨 목소리인데...혹시 숨겨둔 애인이라도?"
" 여보세요?"
" 오빠, 저 경희에요."
" 응, 경희가 어떻게 전화를 다 하고?"
" 호호호... 오빠가 보고 싶어서 전화 했죠."
" 에이, 설마.....?"
" 다름이 아니고, 혜린이 문제로 오빠랑 좀 만났으면 해요."
" 혜린이가 왜?"
" 암튼 만나면 말씀 드릴테니 시간 좀 내 봐요."
" 응, 저녁 먹고 7시쯤 커피 방에서 만날까?"
" 녜, 그럼 나중에 봐요."
" 응, 그래...새해 복 많이 받고....."
" 녜... 오빠도요."
전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 와 앉은 형진은 답답하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연말의 분위기에 휩쓸린 젊은 청춘이라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자유 분망한 그간의 행동이며, 어제의 외박건도 그렇고, 도무지 알 길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눌렀다.
축제 행사에서 얼핏 스쳐 가며 느꼈던 고지식하고 근엄한 공직자인 K국장의 성품을 상상해 보면 엄한 가풍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을법 한데, 그랬는지 여고시절에 교회에서 만난 그 아이는 순한 양처럼 착하고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안하던 순둥이였는데...
" 그런건가?"
때 늦은 반항심으로 이해하기에는 무언가 알 길 없는 의심스런 구석이 있는데 그렇다고 본인에게 대놓고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잔잔한 통기타 가요가 분위기와 어울려 적당히 어두운 공간을 메워주던 커피숍을 시골 버스 시간에 맞추다보니 일찍 도착하게 된 형진은, 흐르는 선율에 몸을 맡기고 가락을 흥얼거리며 창가에 앉아 따뜻한 온수를 홀짝거리며 기다리다 입구로 들어오는 경희를 보고 살짝 손을 들었다.
"어서 와...한살 더 먹더니 많이 예뻐졌어?"
" 오빠도 차암...며칠 됐다고?"
" 뭐 마실래?"
" 따끈한 헤즐럿 한잔 마실까요?"
"좋지.....!
커피 전문점이라 헤즐럿과 블루 마운틴 원두 커피를 한잔씩 주문하고 형진을 마주보고 앉은 경희는 얘기를 꺼냈다.
" 결론부터 말씀 드릴테니 숨김없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 뭘, 아이구...무서워라!"
빙그레 웃던 경희가 정색을 하며 재차 말을 이어갔다.
" 나이와 다르게 속 깊은 친구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저희들은 걔가 오빠를 좋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어요."
취조 받는 사람처럼 다소곳하게 경희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여 듣던 형진이...
" 그건 나도 눈치나 짐작으로 알고는 있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거야?"
" 아직 모르고 계세요?"
" 도대체 나만 모르는 무슨 비밀이 있다는 거야?"
" 어디 얘기를 좀 해봐라...얘기를.....?"
다그치듯 눈을 치켜뜨고 말을 제촉했다.
" 휴.....!"
말 문을 꺼내기가 난처한 듯 한숨을 쉬던 경희가 입을 열었다.
" 혜린이 걔는 이미 부모님이 약속한 정혼자가 있어요."
" 그으래.....?"
눈이 휘둥그래진 형진이 경희의 다음 말을 기다리듯 입술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
" 오빠에게 전화를 하기 전 혜린이랑 통화를 했구요, 어제 밤에 오빠랑 같이 지냈다는 얘기도 들어서 아는데, 혜린이 아빠가 외박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 하셔서 걔 엄마랑 대판 다투시고 외출 금지령이 내려서 집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고 연락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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