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길을 잃다

12. 그들의 천국

에덴의나그네 2008. 10. 24. 06:23

12. 그들의 천국 /졸업과 취업 /강요된 접대 

 

  1년동안의 휴학끝에 부모님의 간곡한 설득으로 복학을 했던 혜린은 한해 늦은 졸업을 하던 그해 회사에 취직을 했다. 아버지의 실직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도 있었고 대학 진학을 앞둔 두 동생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지만, 졸업후의 느슨한  일상에서 오는 잡념에 빠지는 두려움이 싫어서 곧바로 취업을 선택했다.

 

   빼어난 미모와 전공으로 선택했던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실력을 갖춘 재원이었기에 재계서열 3위안에 들었던 D그룹의 계열사였던 S조선소의 비서실에 공채로 합격하여 직장 생활에 적응하면서 쉬는 날에는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했던 선후배들과 함께 어울려 취미로 밴드 연주도 하면서 사회생할에 적응했다.

 

  3개월간의 수습 딱지를 떼고 비서실 선배 동료들과 함께 사소한 차 접대는 물론이고 선박 수주 부서에서 부품 발주와 관련해서 들어오는 팩스 문서를 번역 하기도 하고 가끔씩 일본인 바이어나 선박 감독관이 회사를 방문하면 통역을 대신 하기도 했고, 그들이 인근 남해지역 관광이라도 나서면 가이드 역할까지 도맡아하면서 나름대로 직장에서 인정도 받고 성실하게 근무했다.

 

 봄기운이 물러가고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그날도 밀린 업무를 막 끝내고 퇴근 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다.

 

   "미스 윤! 실장님께서 불러요."

 

   비서실 여직원들의 맏언니격인 강대리가 책상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예.....? 실장님께서 저를 직접요?

 

  직위도 그렇고 관례상으로 봐도 더 윗사람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던 평소와는 달리 직접 부른다는 말에 의아해하며 얼른 옷매무새를 고친 혜린이 실장실로 향했다.

 

   "실장님 부르셨습니까?"

 

   "아, 내가 불렀어. 거기 앉아요."

 

  까운 치마를 접으며 다소곳하게 가죽 쇼파에 앉은 혜린의 맞은 편으로 실장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미스윤이 입사한지가 얼마쯤 됐지?

 

   "예, 이제 5개월 되었습니다."

 

   "그렇구만. 하고 있는 일은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네?"

 

   " 주변에서 많이 도와 주셔서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던 실장은 쳐진 안경을 고쳐 끼더니 주저없이 다음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말이야. 미스윤에게 부탁하나 할까해서 불렀어."

 

   "예.....? 무슨 부탁을?

 

  무슨 난처한 부탁인지 잠시 뜸을 들이던 실장이 이어서 말했다.

 

   "열흘후에 그룹 고위층에서 회사 경영 전반에 대한 점검을 하러 현장에 내려 오시는데 그자리에 미스윤이 손님 접대를 좀 해줬으면해서 말이야?"

 

   "아...예, 당연히 해야지요.

 

   "필요한 자료는 기업 대외비라 내가 직접 내려 보낼테니 그동안 준비하면서 몸가짐도 단정히 하고 기다리도록 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 다시한번 말하지만 외부로 절대 유출하면 안돼는 대외비니까 혼자만 알고 입조심 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웠는데 그만 나가보지?"

 

   "예,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혜린은 책상을 정리하고 핸드백을 챙겨서 통근 버스가 출발하는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룹 고위층에서 누가 오길래 실장님이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지? 그정도 고위층이면 노련하고 경험이 풍부한 선배 언니들이 직접 모실텐데  날 보고 하라는건 또 뭐지?'

 

  일찍 퇴근하는 현장 기능직 사원들과 한데 섞여 덜컹거리며 달리는 통근 버스에 앉은 헤린은 궁금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룹 고위층의 경영 실사가 내려 온다는 소문이 회사내에 파다하게 퍼진 그날 이후로 관리직은 물론이고, 현장에서도 대대적으로 청소와 정리정돈으로 바빠졌다. 현장 구석구석 쓰다 버린 흉물스런 고철 잔재를 치우느라 트럭들이 부산하게 드나 들었고, 사무실에서는 중간 간부들과 임원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사원들을 닥달하며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일주일쯤 지나서 실장실로 불려 들어갔던 혜린이 쇼파에 앉아 비서 실장과 이마를 맞대고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게 실사팀의 당일날 일정 스케줄이니까 차질 없도록 잘 기억하고 서류는 나중에 페기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당일날 저녁 연회는 숙소로 정한 도남동에 있는  관광호텔 연회실에서 있을 예정이니까 회사 까운 외에 별도로 화려하거나 너무 티나지 않도록 단정한 외출복을 한벌 준비해서 행사에 차질 없도록 했으면 좋겠어."

 

  실장은 서랍 속에서 준비해 두었던 봉투를 꺼내 혜린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 이게 다 회사와 미스윤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은거니까 넣어두고 괜찮은 양장으로 한벌 구입해서 입고 참석 하라고."

 

   " 예,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강대리에게 일러 둘테니까 당일날 오후 시간은 평소에 하던 업무는 그만두고 내 지시만 따르도록." 

 

   "예. 알겠습니다.

 

   "바쁠텐데 그만 나가보지?" 

 

   "예.....!" 

 

  상식을 벗어난 접대 관례를 이해하지 못한 혜린은 자기만 모르는 묵시적인 어떤 일이 은밀하게 진행이 되고 있다고 직감 했지만 실장의 고압적인 지시와 회사의 방침이라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던 처지라 경영심사 당일을 기다리며 궁금하고 불안했지만 지켜 볼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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