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겨울 이야기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약속을 했고 나름대로 취지도 괜찮다 싶어 성탄절이 지나
고 그 며칠동안 혜린의 G대 밴드 동아리 멤버들과 몇차례 만나서 모임을 갖고 사전 준비며 연
습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행사일이 며칠 남지 않은 그날 오전에도 성화에 못이겨 두툼한 오리털 파카를 걸쳐 입고 자전거를 끌고 나온 형진은 혜린을 뒤에 태우고 바다를 옆에 낀 해안 도로를 따라 K대학으로 페
달을 힘주어 밟았다.
" 오빠, 저 연습 끝날�까지 곁에 있을거죠?"
무엇이 그리 신났는지 형진의 허리춤을 잡고 뒤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혜린이 이젠 아주 응석 부리듯 말했다.
" 오전에는 가능한데 오후에는 사촌 조카 과외공부 가르쳐야 해."
일찍 보험업에 몸을 담아 제법 큰 돈을 벌었고, 종자돈을 마련하여 장어 통발업으로 재미를
보고 있었던 사촌 큰 누나와 매형의 간청으로 초등학교 5학년 조카 동현이의 과외를 방학동안 하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 과외비 많이 받아?"
" 글쎄, 아직 안받아봐서 모르겠는데?"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지만 반기 학비는 주겠다고 사촌 누나가 이미 약속을 했었다.
" 과외비도 정하지 않고 해요?"
" 하하...! 어련히 알아서 줄라구?"
" 과외비 받으면 저 맛있는거 사 줄거죠?"
" 그럼.....!"
" 아이 신나라...비싼걸로 주문 해야지."
" 하하하.....!"
수산 전문 대학에서 단과 대학으로 승격한 G대학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수백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우거진 캠퍼스에는 방학 기간이라 한산 했다.
벽면 곳곳에 대자보가 어지럽게 붙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본관이 있는 중앙의 넓다란 잔디 운동장 옆의 3층 체육관 옥상에 임시 건물로 지어진 20평 쯤 되는 동아리 연습실은 벌써 몇명이 와서 개인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 선배님 어서 오세요!"
" 어, 수고 많어..."
지방 소도시에 중.고등학교 후배들이라 알고 지내는 사이고, 며칠동안 행사 준비로 일면식
이 있었던 후배들이 인사를 하며 반갑게 맞이한다.
" 혜린이 너.....? 졸병이 늦게 나오고?"
난로불이며 청소며 악기 정리하는 작업이 후배들 몫이었던 것이다.
" 어, 형! 미안해요...다음부터 일찍 나오면 되죠?"
혜린이 얼른 창고에 있는 빗자루라도 가져 올 자세다.
" 관 둬라 관둬, 벌써 다 했어...하여간 저건 뺀질해 가지고 말이야."
" 호호호...좀 봐주세요."
" 말 안들으면 아주 기압을 줘서 혼을 내!"
" 오빠도 차암?"
눈을 흘기며 미소 짓는 혜린의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 하다.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고 연습을 시작한 동아리팀의 좁은 실내는 최근 힛트하는 대학 가요
제 노래와 올드팝이며 빠른 템포의 디스코 음악을 연주했다.
전자 기타와 드럼의 요란한 반주 소리에 고막이 터질것 같아, 멀찌감치 떨어져 귀를 기울이
던 형진은 헤드폰을 끼고 무아지경에 빠져 전자 올겐을 반주하는 혜린의 모습이 오늘따라 무
척 진지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 저 혼자 피식 미소를 지었다.
몇차례 반주 연습과 휴식을 하며 행사에 관한 예행 연습을 반복하던 동아리 팀이랑 캠퍼스
앞 분식점에서 라면이며 떡국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계산을 끝낸 형진은 식당 밖에 세워
둔 자전거 핸들을 잡으며...
"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갈께?"
" 녜, 선배님 내일 또 봐요."
" 응, 수고해....."
막 자전거 페달을 밟을참인데 혜린이 쪼르륵 달려온다.
" 오빠 있지...연습 끝나면 사촌 누나댁에 들리께?"
" 너...정말.....?"
부라리듯 눈을 치켜뜨고 째려봐도 도무지 반응이 없다.
" 얼른 전화번호 가르쳐 줘요...안그러면 못가!"
핸들을 잡으며 애원하듯 다그치는데는 도무지 답이 없다.
" 엉뚱한 상상 하지말고 연습이나 잘해!"
" 녜, 나중에 전화 할께요."
미소를 띠우며 손을 흔드는 혜린을 뒤로하고 페달 밟는 발에 힘을 실었다. 철부지마냥 애교를 떠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 할 일도 아니다. 찬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도로 저편 바다 위로 그날 따라 갈매기들이 유난히 높이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삼촌 전화 받으세요!"
이제 막 과외 수업을 끝내고 아래로 내려간 동현이 고함을 쳤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며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형진은 벌떡 일어나 2층으로 연결된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여보세요?"
"오빠, 나 혜린이."
" 어디니?"
" 응, 오빠가 일러준대로 여기 전신 전화국 앞이야."
" 그래? 잠시 기다려...나갈테니....."
" 추워요! 빨리 와."
저녁 무렵에 바람이 일어나며 또 한 차례 한파를 예고하는지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며 쌀쌀해졌다.
골목을 지나 전화국앞으로 나가니 언손을 비비던 혜린이 저만치서 웃으며 다가온다.
" 여긴 뭐 내구역이나 마찬가지네...여긴 우리 아빠 회사고 저기는도릿골 우리학교 앞이잖아?"
" 하하하.....! 좋기도 하겠다."
"호호호....!"
웃으면서 다가 온 혜린이 덥썩 팔짱을 끼며 옆구리에 찰싹 붙는다.
"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손사레를 치며 혜린을 떼어낸다.
" 뭐 어�... 난 좋기만 한데?"
" 아이구..이 대책없는 철부지.....!"
혹여 누나가 볼까봐 조바심에 손을 잡아 끌며 계단을 타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간 형진이 문을 열었다.
" 와우.....! 집이 운치 있고 아늑해서 참 좋다!"
서구풍으로 가파른 경사를 주어 지붕을 만들다보니 2층 구조의 비교적 넓은 실내지만 다락방처럼 돌출형 삼각창으로 형성된 실내 인테리어를 보며 방으로 들어서던 혜린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곳저곳 눈길을 주다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 너는 초가집에서 살다 왔어?"
관사에 거주하는 혜린을 알고 있는지라 형진이 한마디 거들었다.
" 호호...그건 우리집이 아니지요."
앉았다 말고 벌떡 일어난 혜린이 대뜸 말했다.
" 아...참.....! 인사라도 드려야지요?"
미처 말리기 전에 혜린은 문을 밀치고 실내 계단을 따라 종종거리며 쏜살 같이 내려간다.
" 끄응.....!"
어이없는 표정으로 형진이 신음을 토한다.
" 저 천방지축.....!"
장어 활어를 상고선(운반선)으로 통영에 보내고, 유류비도 절감할겸 선원들 관리도 편하다고 완도로 입항한 어선 때문에 달려 간 매형이 안계신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뒤를 따라 거실로 내려온 형진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더니 소개를 했다.
" 금희랑 동창입니다."
" 아닌 것 같은데?"
잔뜩 호기심어린 표정을 드러내며 누나가 말했다.
" 안녕 하세요? 윤 혜린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다.
" 진이 애인인가 보네?"
" 녜, 자주 놀러 오겠습니다...이쁘게 봐 주세요."
" 아가씨 성격한번 털털하고 명랑해서 마음에 드네, 진이랑 잘 어울리겠는데?
" 아니? 누나까지 왜 이러세요?
그렇잖아도 무안한데 이젠 아주 둘이서 장단을 맞추어 놀려 댄다.
" 날씨도 어두워졌는데 진이는 저녁먹고 여기서 자고 내일 집에 가거라. 불편하면 동
현이 과외기간 동안 여기서 지내도 괜찮고....."
버스 차편이 시원찮은지라 누나가 먼저 알고 배려를 한다.
" 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그래요, 즐겁게 놀다 가요."
" 녜....!"
주방으로 들어간 누나가 냉장고에서 과일이며 음료수를 꺼내어 손님 맞이라도 할 태세다.
" 안녕 하세요?"
" 만화 영화를 보며 텔레비젼에 눈이 가 있던 조카 녀석이 물끄러미 지켜 보다가 인사
를 한다.
" 너 이름 뭐니?"
" 이 동현인데요?"
호기심이 생겼는지 혜린은 장난치듯.....
" 그래, 너 공부 잘하게 생겼다. 삼촌 애인이니까 우리 모른척 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
" 이런.....!"
" 호호호.....!"
주방에서 과일을 깍던 누나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혜린을 째려보던 형진은 부리나케 등을 밀며 2층으로 올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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