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길을 잃다

1-2. 만남과 은둔

에덴의나그네 2008. 8. 6. 03:10

 1-2.만남과 은둔

 

   일동읍 방향으로 북쪽의 계곡이 갈라지는 구릉진 분지에 잣나무와 밤나무 숲이 우거진 볕바른 양지에 자리한 수도원은 예년보다 일주일쯤 일찍 내린 장마비가 고요하고 평화로운 침묵이라도 깨뜨릴듯 폭포수 같은 굉음을 토하며 쉴새없이 아랫마을 개천으로 급류를 쏟아 내고 있었다.

 

  뒤뜰 시냇가 쓰레기장에서 연무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더니 습하고 따뜻한 기류를 타고 공중으로 퍼진다. 청년은 배낭에서 꽤 많은 분량의 태울 것을 주섬주섬 꺼내어 화강암 바위 위에 내려 놓고 한장씩 태우기 좋게 펼쳐 놓았다. 여행길내내 무거운 배냥에 넣고 다닌것을 짐작해보면 보기에도 꽤나 오랫동안 기념했을 추억과 사연이 묻어있는 사진과 여러 수십장의 편지였다.  

 

  무표정하게 잠자코 바라보던 형진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쓰레기를 태우다 불씨만 남은 잿더미위에 차곡차곡 꺼내어 바위에에 널려 있던 편지를 집어 넣었다. 금새 소나기

라도 쏟아질듯 먹구름 잔뜩 낀 하늘에 뽀얀 연기가 더운 공기를 타고 하늘하늘 춤을 추며 피어 오른다.

 

  우울하고 지친듯한 기운빠진 사람처럼 굳은 동작으로 불꽃이 춤을 추는 잿더미 위로 편지지를 집어 넣던 청년의 눈이 순간 반짝 거리며 시선을 멈추더니, 이내 손을 내밀어 그 중 한장의 사진을 집어 들고 뚫어져라 쳐다 보는데,  한껏 미색의 자태를 드러내며 롱 컷트에 웨이브 퍼머를 하고 빨간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아리따운 여자가 드문드믄 억새풀이 자란 갯바위  틈에서 바다를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던 청년의 눈가에 장마철 습기처럼 눅눅한 표정이 이내 베어든다.

 

   "잘가 내사랑 ! 불꽃처럼 목숨처럼 사랑했어...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거야."

 

   "후두둑......!"

 

  물 머금은 먹구름이 흐릿한 하늘에서 굵은 소나기가 퍼렇게 물오른 떡갈나무 잎사귀에 내려 꽂히며 새차게 후려쳤다. 

 

  굳은 돌덩이처럼 아무런 미동 없이 혼 빠진 사람인냥 멍청하게 앉아 한줌 재로 타 들어가는 소재물을 처다보던 그의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도 빗물에 묻어 내리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힘없이 목고개를 들어 허공을 쳐다보던 형진은 거반 태워지고 재만 남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  누구도 미워하지 않게 하소서."

 

   " 원(怨)을 쌓은  어떤 인연도 원망하지 말게 하소서."

 

   " 나의 죄가 내 앞에 겹겹히 쌓여 있습니다."

 

   " 잊고 살게 하시고 버리고 비우며 살게 하소서."

 

   " 이해 하며 살게 하시고 용서하며 살게 하소서."

 

   "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 길 가게 하소서."

 

  과거로부터의 소멸은 현재의 시간마져 망각 하는가? 인간은 얼마 만큼 시간에서 해방이 가능할까? 그 얼마 만큼이라는 시공마져도 잊을 만큼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음습하고 적막이 맴도는고요한 예배실 마룻 바닥에 누군가 들릴듯 말듯 화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청년은 무릎이 저려 마비되고 있다는 몸으로부터의 신호도 잊은 체  신음소리 내듯 낮은 목소리로  엎드려  벌써 몇시간째 무아지경의 기도에 빠져 있었다.

 

   "흑흑흑.....!

 

  그가 엎드린 마룻 바닥에는 땀방울과 눈물 자국이 한데 반죽처럼 뒤섞혀 얼룩처럼 번지고 있었는데, 그의 가슴 속에서 도려내야 할 그 만큼의 아픔이 살아온 시절의 얼룩이 되어 멍이 들었나 보다.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이내 여닫이 문을 따는 소리가 났다.

 

  " 형제여...시간이 너무 오래 되었소. 자신을 너무 학대 해서는 몸도 정신도 결코 이롭

   지 않습니. 형제가 올리는 비원(悲願)의 기도가 노동으로 승화되어 그 땀방울이 기도

   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타이르듯  부드러운 말투로 속삭이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내 문을 닫고 발자국 소리를 남기며 사라져 갔다.

 

  단절...그것은 소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단절과 소멸이 주는 공포에 몸을 떨며 사라져 가나보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생각하고 치열하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호흡하며 사는 동안의 단절도 이토록 힘들거늘, 죽음 직전의 일체 소멸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원치 않는 괴로운 선물을 안기고 태초의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일까?

'천국에서 길을 잃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 성탄의 계절  (0) 2008.08.06
2. 겨울 이야기  (0) 2008.08.06
1. 만남과 은둔(隱遁)  (0) 2008.08.06
차례  (0) 2005.05.20
나오는 사람들  (0) 2005.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