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길을 잃다

10-3. 불편한 만남

에덴의나그네 2008. 9. 26. 12:34

10-3. 불편한 만남


  해발 육백미터 최전방 산골짜기는 11월만 되어도 추위가 매섭다. 겨울내내 수도원을

찾는 방문을 위해 난방용 연탄도 비축 했고, 오며 가며 친분을 익힌 자매 방문객들이

도와 준 덕분에 여름내내 퇴비를 공급하고 땀을 흘려 재배한 배추 무도 김장을 담아 겨

울 준비를 모두 끝냈다.

 

  초록이 무성하던 사연 많은 그 여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승 맞게 울어 대던 뻐꾸기며

잣나무 숲을 던 부지런한 다람쥐 청설모도 자취를 감추고 바지게 가득 버섯을  따며

오가던 산지기도 출입이 끊어진 등성이에는 짧은 가을 화끈하게 불 타던 낙옆이 지고

초설(初雪)이 제법 운치있게 골짜기 사이사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원장실 한켠, 초년 시절의 개구장이 흔적이 여기저기 자잘한 흉터 자국이드러나는 빡빡머리 청년과 살아온 세월의 경륜이 물씬 풍기는 낡은 회색 작업복을 걸친 늙은 원장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 김형제가 처음 여기 찾아 온지 벌써 육개월이 지났어요."

 

    " 예, 그렇게 되었습니까?"

 

  세월을 이긴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잊어 버리려 무던히 속을 끓이며 수련에 정진하던

그도 시간의 셈 앞에는 아연 놀랍기만 하다.

 

   "김형제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수도사로 종신서원을 하려고 하면 오랜 기간동안 여러

차례 시험을 거쳐야 합다. 육개월 일년 단위로 서약을 해야 하며 반드시 세상으로 나가서 스스로 수도자로서의 검증을 하고 사명을 받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 열흘간의 말미를 드릴테니 하산해서 부모님도 뵙고 지인들도 만나보고 결심이 흔

들리지 않고 수도자의 길로 나선 이 부름이 진정한 사명인것을 �닫게 되거든 가족들에게 분명하게 본인의 소신을 밝히고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 오십시오."

 

   "예...깊이 명심 하겠습니다."

 

   "차비를 드릴테니 필요한 사물을 챙겨 다녀 오시되 반드시 약속한 기일내로 오셔야

하며 만약에 여의치 못하면 연락을 주시고 기한 내에 소식이 없으면 퇴소로 간주하고

고 차를 밟겠습니다."

 

  결단을 촉구하는 단호하고 묵직한 원장의 어투에는 비장함마져 스려 있었다.

 

  동거 동락하며 정들었던 도반(道伴)들이 이것 저것 챙겨주는 선물 꾸러미와 여행길에 읽을 책 �권과 옷가지를 배낭에 챙겨 넣고, 경계라 할 것도 없는 수도원 돌담을 벗어나

강구동 마을로 내려가는 산길에 접어 들면서 더위와 다투며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물어 물어 찾아 왔던 그 길을 다시 밟는 감회가 한발자국씩 걸음을 내 디딜 �마다 영화의 한장면처럼 뇌리를 스쳐 가며 떠 올랐다.

  

  새벽 기도를 참여하고 해가 동쪽 하늘에 뜨기도 전에 서둘러 어둑한 새벽길을 걸어 하산을 했던 형진은 철원에서 서울로 향하는 노선 버스를 중간에서 갈아 타고 정오가 되기

도 전에 상봉 터미날에 도착 했다.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며 공중 전화를 찾던 그는 수화

기를 집어 들다 말고 머뭇 거렸다.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몇개월동안의 수도 생활로 침묵에 익숙 했던 그에게 도시의 케케한 기름 냄새에 찌든 소음과 빡빡 머리와 수도복 차림새에 마치 딴 세상에서 온 이방인 대하듯 하며 흘겨보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도무지 낮설기만 했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머리속에 저장 되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버턴을 눌렀다.

 

   " 여보세요?

 

  경상도 억양의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 나오는 순간, 목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무엇인가 치밀어 올랐다. 수련 생활 내내 그립고 또 염려스러워 늘 기도의 끝자락에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 했던 그가 아니던가?

 

   " 여보세요...전화를 했으모 말을 하이소?

 

   " 여보...니 누고? 진이가?"

 

   " 형진이가 맞제?"

 

   " 녜...어머니 형진입니다."

 

   울컥하며 겨우 참았던 형진은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리며 드덤거리며 말했고 수화기 저편에서는 아들의 목소리를 확인한 박권사의 다급한 외침 소리도 촉촉히 젖어 들고 있

었다.

 

   " 아이고...이놈의 자슥아. 어디 있으모 있다고 연락이나 주제. 이리도 어미속을 태울

수가 있단 말이가?

 

   " 어머니 죄송 합니다...저 지금 서울에서 집에 다니러 갈려고 내려가던 참입니다. 도

착해서 말씀 드릴테니 염려 마시고 기다리세요."

 

   " 오냐, 얼른 오너라...내 기다리고 있으마."

 

  서둘러야 저녁 무렵에나 도착할 시간이라 짧은 통화를 끝낸 형진은 청량리로 가는 버

스 정류장을 찾아 고속 터미날로 향했다.

 

  늦은 가을이라 벼농사가 이미 끝난 벌판에는 어지럽게 볕단이 널부러진채 쓸쓸한 평화가 찾아들고 있었고, 그동안의 긴장과 수면 부족으로 오랫만에 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길을 나선 형진은 비몽사몽간에 자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덜컹거리는 차창에 기대어 이것저것 복잡한 잡념에 빠져들며 생각에 잠겼다.

 

  고속 도로에서 벗어나 김천을 거쳐 꼬불꼬불한 함양 지리산 골짜기를 거쳐 자그마치

여섯 시간을 쉼없이 달려 남쪽으로 내려온 버스는 진주를 거쳐 저녁해가 어둑해진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통영에 도착했다.

 

  전화를 받고 미리 연락을 했던지 큰 형 동진이 수산물을 운반하며 바닷물에 절어 녹이 슨 낡은 트럭을 몰고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 여기다. 이리 온나." 

 

  여독이 안풀렸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려 잠시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찾던 형진은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 흔드는 형을 발견하고 오랜 만남에서 오는 어색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 그동안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빡빡 머리에 여기저기 자잘한 흉터가 드러난 흉한 몰골에다 모자 달린 두툼한 수도복까지 걸친 형진의 남루한 행색을 쳐다보던 동진은 인상을 찡그리며 꾸지람하는 투로 퉁명스럽게 첫마디를 꺼냈다.

 

   " 죄송 한걸 아는 놈이 그라고 돌아 댕기나? 대충 사연은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집에

가서 얘기 하자."  

 

  시끄러운 소음과 진동으로 털털거리며 천천히 달리는 트럭에서 형제는 집에 도착하던 40분 내내 입을 닫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트에 몸을 맡기고

앉아있다 말고 집앞에 도착할 즈음에야 동진이 겨우 입을 뗐다.

 

   " 니도 대가리 클대로 큰 놈이고 배운만큼 아는 놈이라 긴소리 안할테니까 그렇찮아도

    여기저기 잔병치례 하는데 니 때문에 맘 고생하는 어머이나 제대로 달래 드려라." 

 

   " 알겠습니다."

 

  대문을 지나 희미한 전기불이 비치는 대청 마루 앞에 선 형진은 말 문이 닫힌체 낯선 방문객마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머이 형진이 일마 왔어예."

 

  큰아들의 나직한 고함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휙 열리더니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박권사가 대청 마루로 걸어 나오며 대성 통곡을 쏟아놓고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금희와 상희도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마당으로 뛰쳐 나왔다.

 

   " 아이고, 이노무 자슥아...어디 있으면 있다꼬 연락이라도 하제. 우째 이리 에미 속을

태우노."

 

   늙은 노모가 안스러워 가슴이 쓰리던 형진도 덥썩 박권사의 손을 부어 잡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 머리는 왜 깍고 옷차림새가 이기 다 뭐꼬?"

 

  밤잠을 설쳐가며 기도하고 한 여름 때약볕에 텃밭 채소 가꾸기와 지게 지고 뒷산을 오르내리며 땔감 준비하는 나뭇군 일이며, 극심한 고행과 노동으로 숯검뎅이처럼 거을러져 살점이라고는 없는 볼을 만지다말고 두툼한 겨울 수도복을 만지작거리던 박권사는 볼꼴 없는 아들의 모습에 기가 막혔는지 연신 통곡을 쏟아 놓았다. 

 

   " 어머니께서 새벽마다 찬 마루 바닥에 엎드려 아들을 위해 소원하고 기도 하시는대로

 주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 아이고, 주여 내 아들이 우짜다가 이리 돼었습니까?"

 

  울다말고 하소연하며 푸념을 늘어 놓는 박권사를 보다못한 동진이 거들며 나섰다.

 

   " 고만하고 방에 들어 가이소. 저녁 밥때라 배고플낀데 밥이나 묵고 천천히 얘기 나누

고요." 

 

  모자간의 애처로운 상봉이 마당에서 길어지자 보다 못한 동진이 나섰다.

 

   " 오냐, 이리 들어 오너라. 금희야 밥 다 되었으면 상 차리온나."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같이 울먹이고 있던 두 동생이 그제서야 인사치례를 했다.

 

   " 오빠.....!"

 

   " 그래, 금희 상희가 어머니 모시고 고생이 많았지. 미안하구나. 오빠가 못난 모습을

보여서...."

 

  두 동생의 어깨를 차례차례 두드리며 위로를 건넨 형진이 배낭을 사랑채 마루에 놓고 신발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 가면서 한바탕 요란한 가족간의 상봉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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